보이지 않던 양자 상전이 지도가 드러나다
물은 100도에서 끓고, 철은 특정 온도 이하에서 자성을 띤다. 이처럼 물질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급격히 변하는 현상을 상전이(phase transition)라고 부른다. 그런데 온도가 아닌 양자역학적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훨씬 더 신비로운 변화가 있다. 바로 ‘양자 상전이(quantum phase transition)’다.
최근 연구자들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그동안 관측과 해석이 어려웠던 대규모 양자계의 상전이 패턴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차세대 양자컴퓨터와 양자소재 개발의 핵심 난제를 해결할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자세계 경계선을 찾는 일
양자 상전이는 절대온도 0K에 가까운 극저온에서 발생한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열에너지 대신 양자역학적 요동에 의해 집단적으로 상태를 바꾸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극도로 복잡한 다체계(many-body system)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입자 수가 증가할수록 가능한 양자 상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고전적인 슈퍼컴퓨터로도 계산이 어려워진다.
물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양자 상전이를 ‘양자물질의 지도’라고 불러왔다. 초전도체, 스핀 액체, 위상물질 등 차세대 양자기술의 상당수가 이 경계 부근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디에서 상전이가 발생하는지, 어떤 집단적 행동이 나타나는지를 정확히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AI가 발견한 숨겨진 패턴
새 연구에서 연구진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이용해 방대한 양자 상태 데이터를 분석했다. AI는 연구자들이 미리 정의한 질서변수(order parameter)에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 내부에 숨어 있는 상관관계와 구조를 스스로 학습했다.
이 과정에서 AI는 대규모 양자계에서 나타나는 상전이의 경계와 특징을 기존 방법보다 효율적으로 식별했다. 특히 복잡한 양자 다체계에서 인간 연구자가 놓칠 수 있는 패턴을 추출해내면서 새로운 분석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구자들은 AI가 단순한 데이터 분류기를 넘어 새로운 물리 법칙을 탐색하는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양자컴퓨터가 풀지 못한 문제를 AI가 돕는다
이번 연구는 최근 양자정보과학 분야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양자컴퓨터는 복잡한 양자현상을 직접 모사할 수 있는 강력한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실제 장비는 여전히 노이즈와 측정 한계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AI를 활용해 양자 프로세서의 동작을 예측하거나 측정 횟수를 대폭 줄이는 기술을 잇달아 제안하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AI 기반 대리모델(surrogate model)을 통해 양자컴퓨터 측정 부담을 99.97% 이상 줄일 수 있음을 보였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AI가 복잡한 양자장론 계산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돼 기존 계산 방법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도 제시됐다.
양자 임계점은 왜 중요한가
최근 이론 연구들은 양자 상전이가 발생하는 임계점(quantum critical point) 근처에서 물질의 성질이 극적으로 증폭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양자 임계 상태에서는 광자와 물질 사이의 얽힘(entanglement)이 크게 강화될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한 차세대 양자센서와 양자통신 기술 개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양자 임계성은 고온 초전도체와 같은 난제의 핵심 열쇠로 여겨진다. 물리학자들은 양자 상전이의 정확한 지도를 확보할 경우 새로운 초전도 물질과 양자소자 설계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AI는 새로운 물리학자가 될 수 있을까
AI가 발견한 패턴이 곧바로 새로운 물리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인 해석과 검증은 여전히 인간 연구자의 몫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AI가 과학 연구의 역할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이론이 먼저 나오고 데이터를 해석했다면, 이제는 AI가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예상치 못한 구조를 찾아내고 과학자들이 그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이 가능해지고 있다.
양자 상전이 연구는 오랫동안 ‘계산 불가능성’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AI와 양자기술이 결합하면서 그 장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던 양자세계의 경계선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관련 논문
Yueyao Fan et al, Layerwise stratification and band reordering in twisted multilayer MoTe 2,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2026). DOI: 10.1073/pnas.2532550123
Lingnan Shen et al, Realization of fermionic Laughlin state on a quantum processor, Nature Communications (2026). DOI: 10.1038/s41467-026-72769-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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